
《윗집 부부》 리뷰
버틴 세대와 선택해야 하는 세대 사이에서
황보름의 『윗집 부부』를 읽으며 처음에는 출산율에 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뉴스에서 자주 보던 저출산, 고령화, 청년 세대의 결혼 포기 같은 문제들이 작품 안으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 소설은 단순히 출산율을 말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책은 한 세대가 믿어온 삶의 방식이 더 이상 다음 세대에게 설득되지 않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균열 앞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먼저 오해하고,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간섭하고, 때로는 훈계한다.
경직이라는 사람
경직은 젊은 시절부터 먹고사는 일을 견뎌온 인물이다.
가난했고, 부족했고, 많은 것을 누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에게 삶이란 깊이 고민해서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 주어진 순서를 따라가며 버티는 것에 가까웠다.
일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늙어가는 것.
그것이 경직에게는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이었다.
그래서 그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아이를 낳지 않거나, 혼자 사는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경직의 눈에는 그것이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젊은 세대의 현실은 경직이 살아온 시대와 다르다.
서울에서 집 한 칸 마련하는 일은 어렵고, 일자리는 불안정하며, 결혼은 낭만보다 계산에 가까워졌다.
아이를 낳는 일은 축복이면서도 동시에 감당해야 할 비용과 책임의 문제가 되었다.
경직은 “우리 때는 없어도 했다”고 생각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지금은 없어서는 시작할 수 없다”고 느낀다.
이 간극이 이 소설의 중요한 긴장이다.
출산율 뉴스가 경직을 흔든 이유
경직은 원래 타인에게 깊은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출산율이 떨어진다는 뉴스를 본 뒤로 이상하게 젊은 사람들의 결혼과 출산에 민감해진다.
누가 결혼을 하는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는지, 왜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지 자꾸 묻고 끼어든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답답하고 꼰대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 더 읽다 보면 경직이 정말 나라의 미래만 걱정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출산율 뉴스는 경직에게 단순한 사회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믿어온 삶의 질서가 끝나가고 있다는 신호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경직의 세대에게 결혼과 출산은 삶의 당연한 절차였다.
힘들어도 아이를 낳았고, 부족해도 가족을 꾸렸다.
그러니 젊은 세대가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경직에게 이렇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이 살아온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정답이 아니다.”
그 말은 경직에게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견뎌온 세월, 가족을 위해 버텼다고 믿었던 시간, 그 모든 것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경직에게 자기 삶이 부정당하는 감각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경직은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설득하려 한다.
그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경직 자신이 믿어온 삶의 방식도 다시 맞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왜 제목은 《윗집 부부》
제목이 참 좋았다.
‘윗집 부부’는 가깝지만 모르는 사람들이다.
같은 건물에 살고, 발소리나 생활 소음은 들리지만 그들의 사정은 알 수 없다.
우리는 벽 하나, 천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존재를 느끼지만, 정작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는 모른다.
이 소설에서 윗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서로 다른 세대가 한 건물 안에 살고 있지만,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리감을 보여주는 장소다.
아랫집의 경직은 윗집 젊은 부부를 바라본다.
그들을 걱정하고, 판단하고, 때로는 끼어든다.
하지만 그 걱정은 온전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해석하고, 자신의 불안을 상대에게 투사하는 방식에 가깝다.
윗집 부부 역시 완벽한 해답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도 불안하고, 불완전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왜 결혼했을까.
왜 함께 살기로 했을까.
어쩌면 그들은 확실한 미래가 있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누군가와 함께 버텨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목 『윗집 부부』는 ‘남의 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말하는 제목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늘 누군가의 윗집이거나 아랫집이다.
서로의 소리는 듣지만, 서로의 사정은 모른다.

버틴 세대와 선택해야 하는 세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작가가 두 세대를 단순히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직은 분명 답답하다.
젊은 사람들의 현실을 잘 알지 못하면서 쉽게 말하고,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다.
그럼에도 경직을 완전히 미워하기는 어렵다.
그는 먹고사는 일이 너무 컸던 시대를 지나온 사람이다.
자기 감정을 돌보는 법보다 견디는 법을 먼저 배운 사람이다.
반대로 젊은 부부는 경직의 눈에는 무모해 보인다.
직업도, 집도, 미래도 안정적이지 않은데 결혼을 한다.
경직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요즘 세대에게 결혼은 더 이상 당연한 통과의례가 아니다.
오히려 불안 속에서 감행하는 선택에 가깝다.
경직의 세대는 “없어도 했다”고 말한다.
젊은 세대는 “없으면 시작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둘 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서로의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에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어긋남을 보여준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
작가는 출산율을 두고 누가 옳고 그른지를 말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출산율이라는 사회적 숫자 뒤에 있는 개인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숫자로 보면 출산율은 하나의 수치다.
하지만 그 숫자 안에는 집값, 일자리, 가난, 부모 세대의 기대, 청년 세대의 불안, 가족에 대한 두려움, 혼자 살고 싶은 마음,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모두 들어 있다.
경직은 그 숫자를 국가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소설은 그 숫자를 개인의 얼굴로 바꿔 보여준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
그래도 결혼하는 사람들.
불안하지만 함께 살아보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 화를 내는 늙은 사람들.
이 책은 그 모두를 한 공간 안에 세워둔다.
읽고 난 뒤 남은 생각
《윗집 부부》는 쉽게 따뜻한 결론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니다.
그렇다고 냉소적인 소설도 아니다.
오히려 계속 묻게 만드는 소설이다.
나는 경직을 보며 부모 세대를 생각했다.
먹고사는 일이 너무 컸던 사람들.
감정을 말하기보다 버티는 데 익숙했던 사람들.
그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선택이라기보다 삶의 순서였을 것이다.
동시에 젊은 부부를 보며 지금의 청년 세대도 생각했다.
선택지가 많아진 것 같지만 사실은 무엇 하나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세대.
결혼도, 출산도, 집도, 일도 모두 계산해야 하는 세대.
그래서 이 책은 한쪽을 비난하기보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왜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내게 이 소설은 출산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너무 쉽게 판단해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남았다.
윗집의 소리는 들리지만, 윗집의 마음은 들리지 않는다.
아랫집의 걱정은 보이지만, 그 걱정이 어디서 왔는지는 쉽게 알 수 없다.
그 사이에서 소설은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모르는 채로도 조금은 다정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