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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줄거리와 핵심 개념 정리: 시몬 베유, 힘, 전쟁, 인간성

by glugombee 2026. 5. 28.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일리아스』라는 고대 서사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고, 시몬 베유 특유의 철학적 문장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붙잡고 있는 질문은 의외로 분명합니다.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을 하는가. 힘은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가. 그리고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을 끝까지 사람으로 볼 수 있는가.

이 책은 『일리아스』의 줄거리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일리아스』를 통해 ‘힘’이라는 개념을 해석하는 책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힘은 단순히 주먹, 칼, 무기, 군사력만 뜻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유가 말하는 힘은 한 사람을 자기 뜻대로 말하고 선택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밀리고 끌려가고 침묵하게 되는 존재로 바꾸는 작용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사물처럼 만들어버리는 힘입니다.

 


일리아스』는 어떤 이야기인가: 트로이 전쟁과 아킬레우스의 분노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트로이 목마나 트로이 함락까지 떠올리지만, 실제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 10년째의 짧은 기간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핵심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입니다.


 

트로이 전쟁의 배경은 헬레네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데려가고, 이에 분노한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공격합니다. 그리스군의 총대장은 아가멤논이고, 그리스 최고의 전사는 아킬레우스입니다. 트로이 쪽에는 헥토르가 있습니다. 헥토르는 트로이의 왕자이자 도시를 지키는 대표적인 전사입니다.

 

『일리아스』의 중요한 갈등은 그리스군 내부에서 시작됩니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전리품을 잃게 되자,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이었던 브리세이스를 빼앗습니다. 여기서 브리세이스는 헬레네와 다른 인물입니다. 헬레네는 트로이 전쟁이 시작되는 계기와 관련된 인물이고,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우스가 분노해 전쟁에서 빠지게 되는 계기와 관련된 인물입니다.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를 빼앗긴 일을 단순한 상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가 짓밟혔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 최고의 전사인 아킬레우스가 빠지자 그리스군은 위기에 처합니다. 트로이의 헥토르가 활약하며 그리스군을 몰아붙입니다.

 

이후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갑니다. 그러나 그는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다시 전쟁터로 돌아갑니다. 그는 헥토르를 죽이고, 분노에 사로잡혀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러 찾아오면서, 아킬레우스는 잠시 인간적인 슬픔과 연민을 마주하게 됩니다. 『일리아스』는 트로이의 멸망이 아니라, 헥토르의 장례로 끝납니다.

 

이 줄거리만 보면 『일리아스』는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몬 베유는 다르게 읽습니다. 그녀는 이 작품을 승리와 영광의 이야기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리아스』는 전쟁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부서지는지, 힘이 인간을 어떻게 사물로 만드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시몬 베유
시몬 베유

 


시몬 베유가 말하는 ‘힘’: 인간을 사물로 만드는 작용


시몬 베유가 『일리아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개념은 힘입니다. 여기서 힘은 단순히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때리는 물리적 폭력만 뜻하지 않습니다. 힘은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압력입니다. 전쟁, 권력, 죽음, 굴욕, 가난, 명령, 복종, 두려움이 모두 힘의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베유는 힘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가장 끔찍한 방식은 사람을 사물처럼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원래 생각하고, 말하고, 선택하고, 사랑하고, 슬퍼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인간은 병사, 포로, 시체, 전리품, 숫자, 적군으로 바뀝니다. 더 이상 한 사람의 이름과 삶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처리되거나 제거되거나 이용되는 대상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베유가 말하는 힘의 핵심입니다. 힘은 죽은 사람만 사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사람도 미리 사물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말하지 못하는 사람,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는 사람도 이미 힘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테르시테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군 안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병사입니다. 그는 아가멤논을 비판하는 말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했던 비판과 비슷한 내용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강한 전사이고, 테르시테스는 힘없는 병사입니다. 같은 말을 해도 아킬레우스의 말은 분노와 명예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테르시테스의 말은 건방진 소란으로 취급됩니다. 그는 오뒷세우스에게 맞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웃습니다.

 

이 장면은 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문제는 말의 진실 여부가 아닙니다. 누가 말했는가,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가 더 중요하게 작동합니다. 힘없는 사람의 말은 진실이어도 짓밟힐 수 있습니다. 시몬 베유는 바로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힘이 피해자만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도 힘에 의해 변합니다. 남을 죽이는 사람은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지만, 결국 그 역시 전쟁의 힘 안에 묶입니다. 베유가 “아레스는 공정하다. 그는 죽이는 자들을 죽이니까요”라는 식의 문장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전쟁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세심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죽이는 사람도 언젠가 죽음의 법칙 안으로 들어갑니다. 전쟁의 공정함은 좋은 의미의 정의가 아니라, 모두를 죽음 앞에 세우는 잔혹한 평등성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에서 전쟁은 영웅들이 명예를 얻는 무대가 아닙니다. 전쟁은 인간을 인간 이하로 떨어뜨리는 힘의 세계입니다. 승자도 패자도, 강자도 약자도, 결국 힘의 법칙 안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시몬 베유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이 책이 말하는 인간성: 적까지도 사람으로 보는 시선

시몬 베유가 『일리아스』를 높게 보는 이유는 이 작품이 전쟁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리아스』에는 영웅이 나오고 전투가 나오지만, 베유가 주목하는 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 작품이 죽음과 고통을 명예나 위로로 덮지 않는다고 봅니다.

전쟁 이야기는 쉽게 한쪽 편을 영웅으로 만들고, 다른 쪽을 악당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편의 죽음은 슬픈 희생이 되고, 적의 죽음은 통쾌한 승리가 됩니다. 그러나 베유가 읽은 『일리아스』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군과 트로이군 모두의 고통을 보여줍니다. 승자와 패자 모두가 인간의 조건 안에 놓입니다. 적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이며, 한 도시의 희망입니다.

 

특히 헥토르는 단순한 적장이 아닙니다. 그는 트로이를 지키는 전사이자, 아내 안드로마케의 남편이고, 어린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그가 죽을 때 독자는 그를 단순한 적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헥토르의 죽음은 트로이 전체의 슬픔이 됩니다.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아킬레우스를 찾아가는 장면은 『일리아스』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원수의 아버지와 친구를 잃은 전사가 마주 앉는 순간, 전쟁의 논리가 잠시 멈춥니다.

 

베유는 이런 순간을 중요하게 봅니다. 전쟁 속에서도 아주 드물게 은총의 순간이 나타납니다. 상대를 완전히 적으로만 보지 않는 순간,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순간, 복수심이 잠깐 멈추는 순간, 고통받는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보는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은 많지 않지만, 그 짧은 빛 때문에 전쟁이 파괴한 것들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 책을 현대적으로 읽으면, 전쟁은 꼭 총과 칼의 모습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오늘의 사회에서도 사람은 쉽게 사물처럼 취급됩니다. 성과, 숫자, 비용, 민원, 진단명, 문제 행동, 실적, 평가표 같은 말 속에서 한 사람의 고통과 삶이 납작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보다 처리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조금씩 사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전쟁에 대한 책이면서 동시에 시선에 대한 책입니다. 시몬 베유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거창한 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을 쉽게 아름답게 만들지 않는 태도입니다. 죽음을 영광으로 포장하지 않고, 불행을 의미 있는 희생으로 장식하지 않고,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남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힘에 눌린 사람을 끝까지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

 

『일리아스』에서 사람들은 죽고, 끌려가고, 모욕당하고, 울고, 복수하고, 무너집니다. 그러나 베유는 그 모든 장면 속에서도 인간을 지우지 않습니다. 적도 인간이고, 패자도 인간이고, 힘에 눌린 사람도 인간입니다. 바로 이 시선이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를 어렵지만 오래 붙잡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시몬 베유가 말하는 힘은 인간을 사물로 만듭니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그 반대의 태도입니다.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보는 것. 전쟁과 폭력, 권력과 고통 속에서도 한 사람의 삶을 숫자나 사건으로 줄이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감각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다면 『일리아스』의 인물 관계를 완벽히 외우려고 하기보다, 몇 가지 질문만 붙잡고 읽어도 충분합니다.

누가 힘을 가지고 있는가. 누가 힘에 눌리고 있는가. 그 사람은 인간으로 대우받는가, 사물처럼 취급되는가. 이 장면은 전쟁을 영광으로 보이게 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가.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어렵지만, 읽고 나면 오래 남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고대 전쟁을 말하면서도 결국 오늘의 우리에게 묻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약한 사람의 고통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를 끝까지 사람으로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